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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미 칼럼 사람보기] 엄마의 시간

기사승인 2019.11.15  21:5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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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미의 사람보기3>

엄마의 시간

[세종인뉴스 칼럼니스트 임수미] 길가에 서서 유모차를 잡고 엉엉 울고 말았다. 운동화 전문 세탁 업체에 신발 한 켤레를 맡겼다 찾은 날이었다. 하얀 운동화를 맡겼는데 회색 운동화가 돌아왔다. 얼룩조차 지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신발이 왜 이러냐고 묻자, 세탁소 아주머니는 신발을 더럽게 신어놓고 깨끗하게 바꿔 달라면 어쩌라는 거냐며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었다.

신발이 더러우니 신발 세탁소에 맡겼지 신발이 깨끗하면 왜 맡겼겠냐고 싫은 소리를 하자 이번에는 ‘뭣 같지도 않은 게 와서 속을 긁는다.’며, ‘꺼지라’ 고 소리를 질러댔다.

이제 막 백 일이 지난 갓난아기 옆에서 쏟아지는 폭언을 들으니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내가 울자 세탁소 아주머니는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자기가 너무 심했다고 아기 엄마가 운이 없다고 생각하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가게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 길거리에서 엉엉 울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육아에 지치고 생활에 찌든 아기 엄마의 모습이었다. 누가 막 대해도 이상해 보이지 않을 만큼 약하고 힘없는 모습.

아기 엄마가 죄인이라도 된 듯 대하는 황당한 꼴을 겪고 나니 아기를 안고 뛰어가도 문을 닫고 출발하던 버스, 택시의 빈차 표시등을 예약 표시등으로 바꾸고 지나쳐 가던 택시는 친절한 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뱃속 아기가 달 항아리 만큼 불렀을 때에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도리어 무서웠다. 괜히 그 앞에 서 있다간 해코지라도 당할까 불안한 마음이 드니 지하철 한 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편이 편했다.

하기야 우리 사회에서 아기 엄마는 벌레와 같은 취급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아기 엄마를 향한 냉대와 혐오를 마주할 때 ‘엄마가 강하다’는 말은 오히려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생명을 품고 매 순간 노심초사 발을 동동 구르는 엄마에게 배려와 보살핌이 아니라 강해야 한다는 엄포를 놓는 말 같아서였다.

엄마의 시간은 외롭고 지루하다. 연약하고 무력한 아기를 한없이 기다리고 품으며 키워내는 시간, 약함을 들켜서는 안 되는 시간,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도와달라는 사람들만 가득한 시간, 마음을 돌볼 겨를도, 몸이 아플 여유도 없는 시간, 너그러워야 하고 느려지는 시간.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엄마의 시간은 강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시간이다.

아기를 안고 버스에 서서 버스 교통 약자석에 그려져 있는 엠블럼을 찬찬히 본다. 어쩌면 매일 엄마의 시간을 살고 있을 사람들이 얼굴도 없이 그려져 있다.

노인, 임산부, 몸이 아픈 사람과 아기 엄마. 모두 우리 사회가 원하는 속도에 못 미치는 사람들이다. 휠체어를 타거나 유모차를 끄는 사람이 버스에 타는 일은 보기가 어렵다.

느린 사람들을 기다려주는 관용을 베풀기에는 세상은 너무나 바쁘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최연소 **, 조기 입학, 영재, 초고속 **’ 이런 타이틀 앞에 느린 사람들의 그림자는 더 움츠러든다.

빠른 것은 아름답고 우수하다는 칭송은 사회를 떠받들고 있는 느린 존재들을 향한 멸시와 등을 맞대고 있다. 느린 사람에게 가차 없고 약한 사람에게 가혹하다. 편안한 사람이 불편한 사람을 이해해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사람이 편한 사람들에게 폐 끼칠까봐 눈치를 봐야 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아주 느리고 약하게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들의 엄마는 태어나 백 일이 넘도록 한 뼘도 움직일 수 없었던 우리를 기다려주었다.

겨우 몸을 뒤집어 하늘을 보았을 때의 환희와 열심히 배를 밀어 만지고 싶던 딸랑이에 손을 댔을 때의 쾌감은 우리의 기억 한 곳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느렸던 시절, 우리의 속도에 맞춰 한없이 느리고 한없이 너그럽게 기다려주었던 엄마의 미소도 함께. 그리고 우리들의 엄마는 다시 노인이 되었다.

젋음을 안고 뛰어 다니던 심장은 어느새 엄마가 되었고, 노인이 되어간다. 우리는 너무 중요한 걸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들의 엄마에게, 엄마의 시간을 사는 늙고 느린 사람들에게 너무 가혹한 건 아닐까.

헌신과 희생에 대한 보답이 냉대와 환멸로 돌아올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울지 않게 된다. 화를 내거나 악을 쓰며 독해지고 마음의 눈은 좁아진다. 생활이 아니라 생존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엄마의 시간에서 바라보면 태극기를 들고 화를 내는 어르신들도 어쩌면 지난했던 세월을 이해 받고 싶은 약한 마음을 이겨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장애인과 소수자들의 단식과 농성은 비장애인과 다수들이 당연히 누려온 불편하지 않은 생활을 함께 하고 싶은 몸부림이다.

고립된 사회에서 모든 책임을 떠안고 아기를 키우는 여성들이 기어이 맘충 소리를 들어가며 악다구니로 변해가는 모습도 엄마의 시간에서 보면 슬프도록 애잔한 일이다.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다른 손에는 아이에게 기울인 우산을 들고 걸음을 뗀다.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세월아 네월아 느린 걸음을 걷는 첫째 아이의 반짝이는 재잘거림을 들으며 집까지 천릿길을 굽이굽이 건너간다.

오늘도 이렇게 엄마의 시간은 아이가 걷는 속도로 흘러간다.

엄마의 시간은 세상에 약한 것들, 그래서 힘겨운 삶들을 돌아보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겨울을 모셔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의 하루에 엄마의 시간이 새겨 준 어린 날의 기억이 아주 잠시라도 새겨지길 바라본다. 그 시간이 세상에 약한 것들에게 건네는 한줌의 온기가 결국은 세상을 아주 조금은 데울 수 있다고 믿는다.

차수현 기자 chaphung@naver.com

<저작권자 © 세종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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