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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미 칼럼] 돌아보기

기사승인 2021.01.19  19: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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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너는 그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했니?”

[임수미 칼럼]

돌아보기

나는 #정인아_미안해 라는 해시태그 하나를 달지 못하고 있었다

칼럼니스트 임수미, “그래서 너는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을 했니?”

전에 살던 아파트 경비 아저씨는 노랑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셨다. 무심하고 태평한 모습이 좋아서 오가다 마주치면 잊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몇 달이 지나서는 고양이가 나에게 먼저 아는 체를 하는 날도 있었다. 하루는 산책을 나가는데 남자 아이 하나가 고양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열 살 남짓 되어 보였다. 어둑한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는 모습을 더러 봤던 터라 하얗고 마른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가 고양이랑 장난을 치나보다 하고 지나치는데 별안간 고양이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치타처럼 화단 너머로 달려가는 것이다. 무슨 일인가 하고 다시 보니 아이의 손에 깨진 유리 조각이 들려 있었다. 맙소사! 아이는 고양이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다른 손에는 피 묻은 붕대가 얼기설기 감겨 있었다. “뭐하는 거야?” 아이가 품은 섬뜩한 뜻을 모른다는 듯이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아이도 덩달아 시치미를 떼며 유리조각을 감추더니 고양이가 사라진 아파트 뒤편 화단 쪽으로 사라졌다.

그 날 이후에도 아이를 몇 번이나 마주쳤다. 놀이터에서 빗자루로 친구를 때리며 깔깔거리는 날도 있었고, 비비탄을 들고 뭔가를 찾아 돌아다니기는 날도 있었다. 그때 나는 만삭이었다. 아이에게 말 한 마디 건네 볼까 하는 생각만 해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이의 손에 쥐어진 빗자루가, 비비탄 총이, 유리조각이 나와 내 뱃속의 아기를 향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다. 어쩌다 그 아이를 만나면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길을 돌아서 가기도 했다. 지인들에게 그 아이 이야기를 하며 그런 애들이 커서 어떻게 될지 함께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하루는 우리나라에 잠깐 산 적이 있는 영국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친구의 한 마디에 머리에 징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너는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을 했니?”

지난 가을, 16개월 된 아기가 입양된 지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보도를 처음 접했다. 세상을 떠난 아이와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난 아기가 내 품 속에 있었다. 

이사를 하고 바뀐 잠자리에 밤새 칭얼거리다 겨우 잠든 아이가 쌕쌕거리며 자고 있었다. 작은 발가락을 손에 쥐어보았다. 여리고 부드러운 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본 적도 없는 아이의 얼굴이 사무쳐왔다. 16개월은 누워 있다가 엎드리고, 엎드리다가 기고, 기어다니다 일어서서, 제 두 발로 첫 걸음을 떼어 온 세상을 뛰어보겠다는 꿈이 생길 시간이다. 그래야 하는 시간 동안 아이는 울 수도 없을 만큼 아팠고 외로웠다. 

슬프게 체념하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분이 치밀어 올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작은 생명을 그렇게 짓밟을 수가 있는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난히 추운 겨울이 왔다. 탐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학대 정황을 샅샅이 파헤쳤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분노했다. 어떤 남성은 보온 도시락에 밥을 담아 아이의 묘소를 찾았고, 손 글씨로 쓴 진정서를 들고 한파에도 우체국으로 향하는 발길이 이어졌다. 

정의와 인정이 남아있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고맙기도 했지만 나는 #정인아_미안해 라는 해시태그 하나를 달지 못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수없이 떠돌아다니는 아이의 얼굴과 학대 정황이 담긴 cctv 영상도 볼 수가 없었다. 내 살처럼 쓰라리고 내 숨처럼 가빠서 실눈 뜨고 간신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비겁함이었을까. 보지 않아도 너무 생생한 고통이라서 보고 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었을까. 

아이의 마지막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엾고 불쌍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누구를 위한 말일까 생각을 하다 문득 고양이를 괴롭히던 남자 아이가 떠올랐다. 고양이를 괴롭히던 그때, 아이의 다른 손엔 피 묻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나는 어째서 고양이를 괴롭히는 유리 조각이 들린 손만 보고 두려워했던 것일까. 다른 한 손에 감긴 피 묻은 붕대는 왜 스쳐 지나갔던 걸까. 겁에 질린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들을 수 있었으면서 도움이 필요했을지도 모를 아이의 모습은 보지 못했던 걸까. 

나는 아이를 쫓아갔어야 했다. 어쩌다 손을 다쳤냐고 물었어야 했다. 아이를 데리고 약국에 가서 소독약과 연고를 사서 치료해 줬어야 했다. 아이가 비비탄 총을 들고 무언가를 찾으며 돌아다닐 때 밥은 먹었냐고 말했어야 했다. 밤에 혼자 돌아다니고 있을 때는 집에 데려다 줬어야 했다. 하얗고 마른 그 아이에게 더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한 건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했다. 

이 순간에도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방임과 폭력 앞에 놓인 아이들의 눈에 그 날의 나는 정인이의 양부모와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정인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래서 너는 그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했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휴대폰 작은 화면 안에서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외면했던 아이의 마지막 모습도, 양모의 학대 영상도 용기를 내어 확인해 본다. 

양모가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과 폭언 속에서 아이는 바랐을 것이다. “도와주세요. 누가 좀 봐 주세요.” 누군가 자신을 봐 주기를, 그리고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다 모든 걸 체념하고 하늘로 떠난 아이의 모습을 너무나 뒤늦게 보았다.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일지도 모르는 또 다른 ‘정인이’들을 알아챌 수 있는 예민한 눈과 마음이 있으면 좋겠다. 타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사는 곳이 서로를 괴물로 만드는 지옥이 아니면 좋겠다. 고양이를 괴롭히려 유리 조각을 손에 들 만큼 아이의 마음이 병든 것은 아이가 자라는 사회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누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이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수백 번의 용기를 내야 할 만큼 어려워진 건 아닐까.

‘우리의 삶과 영혼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타인을 위한 선행은 곧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라고 했던 톨스토이의 말을 떠올려 본다. 

고통 받는 타인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나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얘기다. 돌봄은 주변을 돌아보는 데서부터 시작 될 것이다. 

누군가 나의 생을 대신 살아주고 있다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생도 귀하게 돌아봐야겠다. 실눈 뜨지 않고 제대로 뜬 두 눈으로 서로를 돌봐주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떠난 사람에 대한 가장 진실한 추모는 오래 기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부모의 잘못을 낱낱이 밝혀내고 그들이 어떤 처벌을 받는지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생각하고 기억할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기에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말이다. 아프게 세상을 떠난 아이를 위해 눈물 흘린 사람들의 분노도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쓰일 귀한 에너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정인이가 이곳의 일은 이미 모두 잊고 신의 품 안에서 평안하길 오랫동안 기도하겠다.

편집국 rokmc482@hanmail.net

<저작권자 © 세종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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