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유 교수 칼럼》
아인슈타인 리더십
아인슈타인은 나쁜 남자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평가한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을 살아내던 노벨상 수상자 아인슈타인의 여성관계는 지금의 시각으로 재단해도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1954년 3월, 당시 미국이 만든 가장 강력한 수소폭탄인 '캐슬 브라보'가 마셜 제도에 위치한 비키니섬에서 실시된 핵폭발 실험 장면. 출처: pixabay |
스위스연방 공과대학에서 천재 여학생 밀레바 마리치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자, 첫사랑의 상대인 하숙집 딸 마리에게 절교의 편지를 썼고, 밀레바와 결혼생활 중에는 하녀에게 줄법한 내용의 부부생활 선언문을 강요해서 주위의 눈총을 받았으며, 둘째 아들이 정신병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돌보지 않고 방치했다는 비난에 직면했고, 밀레바와 별거한 후에는 고종사촌인 엘자와 눈이 맞아 재혼을 했으며, 심지어 여러 명의 여인들과 연애를 했다는 염문에 시달렸다. 그의 불편한 결혼관과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사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에게 던져진 의문과 비난은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에 묻혀서 유야무야 면죄부를 받을 법도 한데, 내셔널지오그래픽(NGC)은 이 논란의 주인공에게 결코 가만있지 않았다. 팔을 걷어부치고 그의 시시콜콜한 일대기를 역사적 고증과 생생한 자료를 통해 10부작 시리즈 ‘지니어스’(2017년)에 담아냈다.
인용된 것들 중에는 미국 영사관의 비자발급을 위해 상세하게 아인슈타인을 심문했던 기록과 FBI에서 수십 년 간 도청한 녹음자료, 수사기록(22년간 수집된 ‘아인슈타인 파일’ 1800쪽)이 포함되어있다. 미국에 매카시 광풍을 몰고 온 미 연방 수사국의 후버국장과 부패한 정치인들, 마지막까지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주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프로이센 아카데미 동료교수들의 낯 뜨거운 작태 등은 마치 잔다르크의 재판기록에서 나타난 성직자들의 부도덕한 종교재판을 떠올리게 한다. 때문에 유태인 아인슈타인을 위한 변명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인류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사람들의 가치관은 표류하고 있다. 황금돼지해를 맞이한 이 때에 우리는 아인슈타인에게 물어야 한다. 당신은 불투명하고 표류하던 두세기(19~20C)를 어떻게 살아 냈느냐고 말이다. 그의 리더십을 들여다본다.
루주벨트 대통령이 상대성 이론을 묻자, “뜨거운 석탄을 밟고 서 있으면 1초가 영원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아름다운 여인과 침대에서 1시간을 누어있으면 1초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명답으로 웃음바다를 만들었다.(사진 출처: pixabay) |
첫째, 아인슈타인은 책임지는 연애와 사랑을 했다. 대학에서 동료 여학생 밀레바를 만나서 불같은 사랑을 나누고자 할 때 정말 괴롭고 힘들지만 회피하지 않고 첫사랑 마리에게 절교의 편지를 썼다.
천재과학자 밀레바와 결혼생활을 하면서 함께 세기적 논문인 상대성 이론, 광양자 가설, 브라운 운동을 저술했지만, 부인이 심각한 우울증에 의부증이 겹치면서 아인슈타인의 일상은 무너졌다. 8년간의 결혼생활 중 5년간을 불화에 시달렸고 아내와 별거 중일 때 한참 연상인 사촌누나 엘자의 모성애적 사랑에 끌렸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의 두 아들을 합의도 없이 스위스로 이주시켰고, 이혼조건으로 그의 연봉수입 거의 전부와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면 받을 상금 전액을 요구했다.
그는 부양의 의무를 이행하려 노력했고 둘째아들이 원할 때 정신병동을 방문했으며 맏아들의 학문을 격려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이해가 안 되겠지만 말년에 젊은 연인들과 사랑을 나눌 때는 부인 엘자의 승낙을 받기까지 했다.
둘째, 아인슈타인은 지식인의 세기적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독재자 히틀러의 전쟁 계획에 당대의 최고 학자그룹인 독일의 프로이센 아카데미 동료들이 모두 지지하는 서명을 할 때 홀로 거부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저명한 학자로서 최초로 흑인대학에서 특강을 했고, 이스라엘 건국운동에 참여할 것을 거절하다가 당시에는 비공개였던 유태인의 대량학살 장면을 담은 영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시오니즘에 앞장섰다.
FBI의 후버국장에게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원자폭탄 제조의 원흉으로 지목당하면서도 지식인들을 모아서 ‘원자력과학자 비상위원회’를 결성하여 인류의 미래에 닥칠 불행을 막고자 몸부림쳤다. 이 기구를 통해 아인슈타인은 처음으로 세계정부(UN) 구성의 과제를 제안했다.
셋째, 아인슈타인은 따뜻한 인간애와 유머를 잃은 적이 없다. 대학교수직을 얻지 못하고 특허청의 말단직원으로 근무하면서도 4편의 위대한 논문을 저술했고, 거듭되는 노벨재단의 수상 지목 불발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상대성 이론을 설파했다.
이웃의 빵가게 주인과 서민들에게조차 상대성 이론을 설명해주었다. 미국비자 심사를 맡았던 대사관의 부영사가 공산주의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지 않을 경우 비자신청을 거부하라는 미연방수사국장의 지시를 어기고 승인 도장을 찍어주자, 아인슈타인은 부영사의 희생적인 행동에 크게 감동하여 서명을 해주면서 앞으로 비자를 신청할 유태인들을 부탁했다.
부영사는 이후 5만 명이 넘는 유태인들의 비자를 승인해주었다. 히틀러의 전쟁 위협을 알리고자 만났던 자리에서 루주벨트 대통령이 상대성 이론을 묻자, “뜨거운 석탄을 밟고 서 있으면 1초가 영원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아름다운 여인과 침대에서 1시간을 누어있으면 1초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명답으로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아인슈타인은 76세(1956년)에 복부동맥류 파열로 사망하기 전 이웃의 11세 소녀 엘리스에게 금기 식품인 쿠키를 몰래 얻어먹는 재미를 누리면서 수학숙제를 도와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위기의 순간에도 과학자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애썼다. 유명해진 뒤에는 자신의 가치를 자유(Freedom)와 인간애를 위해 활용했고, 세계정부 수립이라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했으며, 사생활을 누리면서도 책임 있는 연애를 하려고 노력했다. 한순간도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의 익살스런 만면웃음의 마크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영웅의 따뜻함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우고 있다. 새삼 그의 리더십을 생각한다,
김대유 교수 dae583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