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유 교수의 연재칼럼
3)딸들의 시대
[세종=세종인뉴스] 임우연 기자 = 비겁한 남자들에 의해 자칫 전설로 격하되었을 법한 잔다르크의 이야기가 어떤 드라마보다 더 생생한 역사의 진실로 남게 된 것은 오로지 그 재판기록 때문이다. 잔다르크는 평민의 딸이고 평민의 딸로서 왕을 세우고 100년 영․불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끌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평민도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민권(民權)‘의 개념을 세운 것이다.
▲ 성녀 요안나 아르크(출처=위키백과,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버려지고 배신당하고 마녀로 지목되어 불태워진 19살의 삶과 죽음의 여정은 평민의 눈물로써만 동정(同情)할 수 있는 슬픔의 영역이다.
“나의 몸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타버려 재로 돌아 가누나”,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재로 돌아간 평민 잔다르크는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무덤이 없으니 비석이 있을 리 없다. 로마 교황청은 1920년에 이르러서 잔다르크에게 공식으로 사과하고 시성했다.
역사 이래로 못난 남자들은 걸핏하면 여인의 공을 깍아 내리고 위조하고 삭제해왔다. 이집트의 위대한 여왕 파라오 하쳅수트는 그녀의 의붓아들 파라오에 의해 거의 모든 업적이 훼손당하였다. 심지어 하쳅수트가 파라오로 재위했던 20년의 기간까지 ‘없던 시간’으로 부정했으니, 의붓아들 투토모스 3세의 질시가 어떠했는지 짐작할만하다.
믿거나말거나 여자 교황이 존재했고 그녀의 이름은 요안나였다. 교황의 신분으로 아이를 낳다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요안나는 여성이라는 신분 때문에 교황 연대표나 모든 기록에서 삭제가 되었다고 역사가들은 증언하고 있다.
종교조차 딸들의 세기를 시기했다.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여서(사탄을 대리로 내세웠지만) 인류의 원죄를 여자에게 짊어지게 한 신 역시 남성이다(그럼 여성인가?). 신은 성이 없다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성경의 신을 묘사한 모든 대목은 하나님이 다 남성으로 나온다. 신의 아들인 예수님도 남자다.
18세기에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책을 쓴 최초의 여성인권운동가인 영국 런던 출신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는 가난한 평민의 딸이다. 아내가 남편에 의해 합법적으로 매매되던 시대, 근대의 인간해방의 역사조차 여성에게는 비켜가던 시절에 그녀는 여성의 평등과 권리를 주장하여 남자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의 외로운 사상은 20세기 이후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위한 시금석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상류층 가문의 딸로 태어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스스로 몸을 낮춰 평민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천직(賤職)이었던 간호부가 되었고, 평등한 의료의 혜택을 위한 사회운동, 병원개혁운동에 전념했다.
사재를 털어 성 토머스병원 내에 나이팅게일 간호양성소를 세움으로써 교회나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던 간호교육을 최초로 독립된 정식학교로 옮기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나이팅게일이 간호대학의 상징이 된 이유 중의 하나다.
▲ 경대학교 김대유 교수 |
한국인의 협동정신과 희생정신은 가끔 국난 속에서 빛난 적이 있다. 정치가 희망을 보일 때, 그 때 비로소 국민들은 협동하고 희생할 줄 아는 마음을 모았다. 정치는 실종되고 지도층은 부패하고 관료주의가 팽배하면 국민수준은 저절로 낮아진다.
수준이 낮아진 국민은 늘 부패한 정권을 지지한다. 거기에 빠져 죽는다. 혹여 정치가 부패하더라도 지식인, 정신적 지도자들이 깨어 있으면 국민은 그 분들에게라도 의지해서 희망의 정치를 만들어내고 싶어 한다. 그 희망의 씨앗이 되어 줄 지식인, 정신적 지도자 그룹이 민중 속에서, 민중의 눈물 속에서 새롭게 피어났으면 좋겠다. 21세기는 딸들의 시대여야 한다. 우리의 딸들이 마음 편안하게 사는 세상, 그녀들이 웃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정치를 탄생시켰으면 좋겠다.
봄꽃은 피고지고 사는 일은 항차 아득한데 희망을 논하고 시국을 논하는 일은 여전히 덧없다. 잠시 민중의 눈물과 민중의 꽃을 생각한다. 민중의 딸들과 귀향의 슬픈 딸들을 생각한다.
임우연 기자 lms700325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