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유 교수 칼럼〉
두발자유화와 교복폐지 교복은 국민복인가
사진출처=구글 |
[세종인뉴스 칼럼니스트 김대유 교수] 태극기 휘날리며, 올드보이, 말죽거리 잔혹사, 친구, 실미도, 두사부일체, 여고괴담, 은교, 마더…. 이른 바 백만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이다.
밀리온 박스를 링크한 이 영화들이 갖는 공통점은 ‘교복’이다. 주인공들이 걸친 교복은 영화의 동기(Motive)를 제공할뿐더러 세대를 초월한 공통의 감성을 드러낸다.
교복의 용도와 느낌은 다채롭다. 어둡고 컴컴한 학교의 복도에서 하얀 교복은 공동묘지형 처녀귀신을 표현하는 도구로 적합하다.
교실에서 선생님에게 따귀를 맞고 운동장에서 뒹굴 때 교복은 교련복처럼 자연스러우며, 교복은 빡빡머리에 가방을 둘러매고 질주하는 깡패 아이들의 단체복으로도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은밀한 동성애와 근친상간적 터부(Taboo)의 요소는 수녀복 같은 느낌을 주는 교복 속에서 수줍게 피어나며, 교련복에 교모를 쓰고 총을 든 학생의 모습은 전투하는 병사의 숙연한 비애와 오버랩 된다.
교복은 아이들에게 입시공부와 통제의 기제로 작동하는 반면 어른들에게는 잔잔한 추억과 향수로 다가든다. 교복은 어느새 DNA처럼 부동의 국민복이 되었다.
교복은 언제나 어디까지나 우리의 아이들이,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이 끝도 없이 입어야 할 운명의 옷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에게 진정 교복은 무엇일까? 왜 아무런 이의 없이 교복은 대물림되어야만 하는가? 한번쯤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십대들에게 교복은 억압과 해방의 분기점이 된다. 그들에게 교복은 답답한 현실을 나타내는 억압의 표징이며 아무 생각 없이 입어야 할 일상복이다. 학교에서 교복은 모범생과 불량학생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여학생들은 기회만 있으면 치마길이를 무릎 위로 끌어 올리고 남학생들은 바지의 폭에 변화를 주어 멋을 부린다. 멋 부릴 것이 교복뿐이기 때문이다. 이른 바 학생생활을 규정하는 학교의 선도규정은 주로 이 교복을 기준으로 하여 제정되었다.
“양말은 흰색 면양말을 착용하되 복숭아 뼈 위로 올라오는 것을 금지한다.”
“두발은 단정해야 하며 귀밑 3센티미터 이상 기르는 것은 금지한다.”
“염색과 퍼머를 금지한다. 귀걸이, 목걸이 등 일체의 장신구를 금한다.”
이와 같은 내용의 선도규정은 어느 학교나 엇비슷하다. 선도규정은 교복을 기준으로 용모와 신체를 맞추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교복을 통해 문화를 표현하고, 교장들은 교복을 기준으로 선도규정을 적용한다.
대다수 학생들은 자신들이 입을 교복 결정은 자신들이 해야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YTN뉴스 캡처) |
교복은 시대의 유물
교복은 시대의 유물이자 현존하는 율법이다. 교사들은 아침마다 눈에 불을 켜고 아이들의 치맛단 길이와 바지통의 폭을 잰다.
시대의 유물을 지키기 위함이다. 아이들 스스로도 교복에 대해 민감하다. 교사와 아이의 감정대립은 용의복장검사로부터 시작된다.
교복이 학교생활(life cycle)에 끼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학생생활부는 교복을 지키기 위한 부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대다수의 아이들이 교복을 기준으로 한 용의복장 검사로 인해 감점처분을 당한다. 교복은 그 자체가 시어머니이며 불변의 권위이다.
그러나 두발규제에 항의하여 촛불을 들고 뛰어나온 아이들 속에서 모범생과 불량학생을 가려내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다. 두발은 교복과 관련이 없고 아이들이 오직 두발의 길이를 따지자는 문제라고 설명하는 장학사들의 답변 또한 허망하다.
아이들 또한 운명이 되어버린 교복 자체의 존폐 여부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이 희박하다.
서울시교육청(교육감 조희연)은 두발자유화를 선언했다. 그 성공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사실 두발과 용의복장은 교복의 존치를 전제로 할 때 영원히 풀 수 없는 등식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것은 왕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민주정을 실시하자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교복과 자유로운 용의복장의 욕구를 절충시킬 수 있는 해법이 있다면 그 사례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다.
일본 역시 오랫동안 교복의 존치여부로 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다가 오늘날 우리가 웃음을 베어 물며 지그시 구경하는 일본 교복 패션을 정착시켰다, 치마는 무릎 위로 한참 올라가고 바지는 다리에 착 달라붙어 노랗게 염색한 머리와 부조화를 이루는 일본 교복, 이지메와 모순으로 가득찬 학교생활에 노랗게 깃발처럼 나부끼는 교복, 어느새 포르노의 단골 복장이 되어버린 교복, 그 모습이 우리의 미래상이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교복이 우리 교육체계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교복을 입었으니 교복에 맞춘 선도규정을 지켜야 하고, 교복을 기준으로 체육복도 단색(혹은 단색 가까운)으로 맞춰야 하며, 마이와 조끼, 블라우스, 체육복에 이르기까지 평균 4,5개의 명찰을 부착해야 한다.
사각형 교실에 붙박이로 앉아 있는 아이들은 계절에 따라 모두 수녀복처럼 까맣거나 수의처럼 하얀 교복을 입는다. 교사의 눈에 아이는 아무개라는 개별적인 인격체가 아닌 4분단 셋째 줄의 교복 입은 4번으로 보인다.
어쩌다 야외학습이 있어서 자유복을 입는 날에는 갑자기 총천연색의 개성이 돋아나는 아이들의 개별화된 모습에 교사들은 현기증을 일으킨다. 교복은 말짱하게 개별성을 증발시키고, 그 대신 획일성의 편리함을 가져다 준다.
김대유 /교육학 박사,경기대학교 초빙교수 |
두발자유화 성공하려면 교복폐지해야
교복은 교육재정과 교육행정의 기준으로도 작용한다. 한국은 OECD국가 중에는 드물게 학점제에 의거한 교과담임제를 채택하지 않고 붙박이 학급담임제를 운영하는 나라다.
학급담임제는 일제(日帝)시대 군사조직인 반(班)으로 학교를 운영하던 습관에서 비롯되어 오늘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학생 수당 교원 수를 따지기보다는 학급당 교원 수를 헤아려서 교원수급을 한다.
교장과 교감의 정원도 학급 수를 기준으로 배정되고 주요 교과의 교사 수급 역시 대개 6학급을 기준으로 충원되는 방식이다. 우습게도 교육여건을 따질 때 교육과학기술부 관리들은 학급당 학생 수 1명을 줄이는데 1조원이 소요된다며 일쑤 교육여건의 개선을 촉구하는 정치권을 침묵하게 만든다.
이쯤 되면 교복은 마술이다. 학급담임제는 아이들에게 교복을 입혀서 담임교사로 하여금 획일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유지되기 어려운 제도다. 학급은 횡적 개념이 증발된 종적 개념의 공간이다.
교복을 없애면 자기 옷을 고르는 아이들의 시선에 색감이 묻어나고, 흑백의 틀을 뛰어넘어 다양성의 빛깔을 담을 수 있다. 학급담임제를 폐지하고 학점제와 교과담임제를 실시하면 최소한의 교과선택권이 아이들에게 돌아 갈 수 있다.
교복이 폐지되면 총천연색 감각은 미래의 의류산업과 에니메이션 산업 등 첨단산업의 발전을 위한 동력이 될 수 있다. 교복을 없애면 교복을 매개로 한 선정성 시비도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다. 두발 자유화가 교복폐지를 전제로 하지 않는 한 성공하기 힘들다. 교육개혁은 아이들의 바다에 풍덩 빠지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신기루이다.
■김대유 교수 프로필 : 세종시 연서면 출생, 교육학 박사
현)경기대학교 초빙교수, 국가인권위원회 사회권전문위원회 위원, 대한교육법학회 이사, 아름다운학교운동본부 공동대표
전)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회 위원, 국가청소년위원회 정책자문 위원 등 역임
김대유 교수 dae583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