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의 월요이야기 - 제89호('24.11.11.)]
- 아이의 작은 우주에 들려줄 이야기들 -
제 딸이 아기였을 때, 팔베개를 하고 뉘여 이리저리 뒹굴 거리며 즉흥적으로 들려준 옛날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 엄마가 된 딸이 그때 들려준 아빠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렸을 때 무심코 들은 이야기가 ‘평생 한 사람의 세계를 지배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의 작은 우주 속에 아빠에게 들은 옛날이야기는 어쩌면 샛별처럼 지워지지 않는 별들이 되어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살까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끔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TV와 스마트폰, 유튜브 등에서 마구 쏟아져 나오는 무섭고도 정제되지 않은 어른들의 못된 이야기들. 전쟁, 탄핵, 적개심, 미움, 증오, 폭로, 복수...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 작은 세상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요즘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화가 없다고들 합니다.
엄마 아빠가 식탁에서 아이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요? 지긋지긋한 공부 이야기? 돈 버는 이야기? 세상 못된 이야기? 세상일에 바쁘고 세대차가 나서라고 둘러대 보지만, 근본적인 것은 함께 대화를 나눌 화제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7년 전이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이 매일처럼 전쟁 이야기로 불안하기만 하고,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탄핵 이야기가 온 세상을 뒤덮어 촛불시위다, 태극기 부대다 하며 증오와 갈등이 극에 달했던 2017년. 그 해였습니다.
험악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손녀딸에게 들려줄 옛날이야기를 만들어달라는 딸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과연 자녀와 부모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점을 찾아 동화 책을 샅샅이 훑어보았습니다.
모처럼 안데르센 동화책 전집을 사서 읽어 보았습니다. 연초 신춘문예에 실리는 주요 신문들의 동화 수상작들도 읽어보았습니다. 어렸을 때 무심코 읽었던 동화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보니 새삼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실망이 밀려왔습니다.
화려한 정장의 알록달록한 예쁘고 비싼 동화책들. 그러나 내용도 빈약하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말해주려 쓴 것인지 어른인 저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인어공주와 백설공주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인지, 무엇이 아름답다는 것인지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예쁘고 아름다우면 선이고, 외모와 귀족과 부가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란 것인지, 동화 속의 복수란 또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 백설공주와 왕자가 의붓엄마인 왕비를 불에 달군 쇠구두를 신겨 죽을 때까지 춤을 추게 했다는 복수 대목에서는 아연실색해버렸습니다.
재미와 감동과 교훈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읽고 서로 의견을 나눌 만한 건강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대화의 소재로 삼도록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동화’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만든 이야기를 한 편 한 편 딸에게 보내주었습니다. 딸은 대만족이었습니다. 운 좋게도, 이 이야기들이 선정되어 중앙일보에 연재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출판사에서 책으로 내자는 제안이 왔습니다.
책 제목은 ‘어른이 되었어도 너는 내 딸이니까’라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 "가족동화" 책을 그 해 추운 겨울의 따뜻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출시했습니다. 한 달 동안 전국의 교보문고의 “Hot& New” 코너에 일제히 전시되었습니다.
7년 전 출간된 그 가족동화 책이 올 가을, 불가리아어로 번역 출간되어 타국의 가족들에게도 읽히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유럽동화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한국의 가족중심적 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도 심심하여 소설가 아버지의 서재에 있던 책을 빼보다가 습자지가 먹을 흡수하듯...아버지의 세계관을 이어 받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유년시절 에피소드입니다. 아이들이 지니고 태어난 작은 우주는 부모의 철학과 영혼으로 크고 작은 팽창을 반복한다는 것에 부모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 직원 여러분들은 우리 아이에게 어떤 우주를 그려주시겠습니까? 공부 잘하고 출세하여 돈 많이 버는 어른이 되는 우주를 그려주시겠습니까?
생각하는 동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대책 없이 무개념의 어른들을 보면서 말입니다. 언젠가는 출간하고 싶은 또 하나의 동화책이 있습니다.
"철학동화"
누가 알겠습니까? 어느 날 아침 식탁에서 나눈 소소한 대화가 그 아이의 세계관으로 무럭무럭 자라 우리의 운명을 거머쥐고 좌지우지할 위인으로 만들어 낼지.
- 세종특별자치시장 최민호 -
차수현 기자 chaphung@naver.com